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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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인터뷰
  • 전아영
  • 승인 2021.01.1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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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사진제공=김영웅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사진제공=김영웅

Q 반갑습니다. 우선 소개 부탁드려요.

A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김영웅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장애로 인한 사회적 편견을 개선하고 그로 인한 차별을 철폐해, 장애인의 권익향상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강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희귀난치성 질환인 골형성부전증으로 인해 약한 뼈와 작은 키를 갖게 되었습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서른 번이 넘는 골절과 수많은 수술을 경험해야 했고, 성인이 된 지금도 키가 1m가 채 되지 않습니다. 유년시절 잦은 골절로 병상에서 지내는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절망과 좌절에 갇히기보다 희망과 도전을 다잡으며 성장해왔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인해 초등학교 편입을 매번 거부 당하고, 초등학교가 의무교육과정이란 이유로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어서도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문전박대한 학교를 다시 찾아가 편입에 성공, 개근상과 우등상, 졸업장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장을 들고 중학교에 당당히 찾아가 또래보다 1년 늦게 정규교육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번번이 뼈가 부러지던 유년기엔 한번 다치면 2~3달을 옴짝달싹할 수 없으니 늘 조심스러웠지만,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선 다양한 도전을 거듭하며 활발한 교내외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젠간 나와 같은 사람들, 나보다 힘든 사람들도 나처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고,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Q 여러 가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와 권익 추구 활동에 매진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되신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A 대학에 진학한 후로도 같은 어려움을 가진 이들,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지만, 마땅히 어떤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인터넷 등을 통해 저처럼 희귀난치성 질환인 골형성부전증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고, 10여 명 정도 찾은 와중에 우연히 대학 기숙사에서 TV를 보다 저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척 밝게 지내는 어린 남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장 그 아이들부터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연락을 시도했고, 창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작은키모임이란 단체의 세미나에서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작은키모임의 서울지부장으로 모임의 운영과 살림을 맡게 되었는데,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첫 시작은 바로 그날 그 시간 TV에서 두 아이들을 본 것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남매 가운데 오빠는 중의학 의사, 동생은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 등 멋진 모습으로 성장했고, 지금까지도 반가운 소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활동 모습./사진제공=김영웅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활동 모습./사진제공=김영웅

Q 다양한 사회활동과 봉사를 실천해 오셨는데,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특수학교에서 공부하며, 제가 가진 어려움 외에도 장애로 인한 다양한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98년 가을 무렵 청소년 인권헌장 개정 공청회가 있었는데, 고맙게도 제가 전국장애청소년 대표 자격으로 배석해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동안 제 자신의 경험,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각종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장애청소년들을 위해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되짚어 보면 그때의 눈물 섞인 호소에도 누구 하나 응답할 수 없는 현실을 발견하고, 그저 변화를 호소하기보다 변화를 만드는 사람, 언젠가 같은 눈물에 기꺼이 응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 한국작은키모임 활동을 시작했을 땐 키가 작은 저신장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면, 그것만으로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지않아 그 안에서도 다양한 장애 원인에 따라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굳은 결심 끝에 2003년 한국 골형성부전증 모임을 창립,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같은 어려움을 가진 이들을 위한 일에 더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회복지 활동이라도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없다면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17년 이상 두 단체를 운영하면서 만난 많은 이들의 슬픔과 절망이 웃음과 희망으로 바뀌어온 매 순간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좀 더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을 보듬어주기보다 우리 사회 전부를 희망으로 수놓기 위한 일에 더 열중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강연을 다니고, 시민단체와 정당 활동을 통해 장애인을 위한 정책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생각이 바뀌고, 그로 인해 달라져가는 세상을 조금씩 마주할 때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작은 촛불처럼 쉼 없이 빛을 전하고 싶습니다.

Q 최근 SNS에서 봤습니다. 볼링과 당구를 즐기시는 것 같았는데, 솔직히 점수가 궁금합니다. (웃음)

A 작은 키 때문에 운동을 즐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고등학교 때 잠깐 탁구에 빠져 지낸 적도 있고, 물에 뜨지 않는 몸에 부력 기구를 끼워 1년 반가량 어설픈 수영에 매진한 적도 있습니다. 아마 최근 SNS에서 보신 볼링 사진은 몇 해 전 지인 자녀의 돌잔치에 참석했다가 일행과 가서 즐기던 모습이었을 겁니다. 볼링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것인데, 공이 너무 무거워 바닥에 앉아 어렵게 몇 번 굴려본 게 전부여서 점수라 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나마 아주 드물게 당구장에 가긴 하는데, 포켓볼로 밥값 내기를 하는 정도이지 수려하게 잘 치진 못합니다.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활동 모습./사진제공=김영웅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활동 모습./사진제공=김영웅

Q 정당 활동과 위원회 활동도 많이 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일은 어떤 것이셨나요?

A 2004년 총선 때 선거캠프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으로 현실 정치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도움드렸던 후보를 홍보하기 위해 후보 홈페이지에 영화 포스터 패러디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후보는 주목받지 못하고 대통령 탄핵정국을 풍자한 패러디만 언론에 회자되어 뉴스와 신문에 실리고 경찰서에 불려가는 등의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훗날 그때 알게 된 인연들을 통해 대선캠프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정당에 입당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입당 후 이듬해부터 주변 분들의 권유로 지역 장애인 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당시만 해도 장애인을 위한 지원과 관심이 적어서인지 이어진 2008년과 2010년 선거에 지원했음에도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묵묵히 지역 활동에 매진해오다 2012년 총선 즈음 정당 내에서 청년비례 국회의원을 오디션 형식으로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각종 TV 오디션 프로그램이 급부상하던 때였는데, 정당에서 이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으로 후보를 뽑아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장애인을 위한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거듭된 공천 실패와 신선한 공고 내용을 보고 관점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같은 세대와 경쟁해 능력을 인정받고 대의권자가 된다면, 그 자체로 훨씬 더 큰 변화를 이끌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에서 무려 370여 명의 지원자가 도전했는데, 전문 심사 평가단에 의해 진행된 1차, 2차, 3차 예선을 모두 통과하여 당당하게 최종 경선 후보 16인까지 올랐습니다. 경선에는 안타깝게 떨어졌지만 당시 도전했던 동기들과 함께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듬해인 2013년부터 만 39세였던 2019년까지 정당 내에서 전국청년위원회 활동에 매진하며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정당 내에 청년 최고위원을 둔다거나, 청년을 위한 경선 가산점을 부여하는 일, 청년대변인을 운영하는 일 등 지금은 제법 일반적이지만 당시 매우 생소하고 실현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들을 늘 가장 먼저 제안해 오늘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당내에서 전국청년위원장, 전국 대학생 위원장 등을 도맡아 고생해온 청년들이 현역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간의 활동에 큰 보람이 느껴집니다.

최근엔 청년위원회 활동을 마치고 장애인 위원회 활동을 통해 복지정책 개발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청년을 위한 정치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걸린 시간보다 더 빨리, 장애인을 위한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란 기대를 안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포부가 있으신가요? 가장 큰 목표는 어떤 것인가요?

A 제 꿈은 대통령입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을 꼭 이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는 국가장애인 위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세상은 분명 누구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제 더는 유럽의 복지 선진국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K-방역, K-문화, K-경제처럼 대한민국을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K-복지 복지 선진 국가로 만들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올림픽과 패럴림픽, 아시안게임과 장애인 아시안게임 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뉘어 운영되는 모든 국제 스포츠 경기를 같은 기간에 개최하는 것입니다. 만일 두 경기를 같은 기간에 열게 되면 메달의 가치도 똑같아지고, 선수의 명성도 똑같이 기억될 것이며, 세계 각국의 사회복지 관점도 크게 높아짐과 동시에 장애인에 대한 존중도 향상될 것입니다. 똑같은 메달을 목에 걸고도 4년간 다시 대중의 무관심 속에 외면당하는 장애인 스포츠인들을 양지로 이끌어, 장애인을 보는 세계인의 시선이 달라지게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세계 최초 전동 휠체어를 탄 대통령, 통일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제나 준비된 사람이 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활동 모습./사진제공=김영웅
김영웅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원 원장 활동 모습./사진제공=김영웅

Q 국가의 장애인 지원 서비스가 더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우리나라 장애인 정책의 모든 출발은 장애인복지법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체장애자복지법에서부터 개선을 거듭해온 장애인복지법상의 복지는 결국 장애인을 정책 수혜자로만 보는 개념을 우선합니다. 이와 달리 장애인이 정책의 주인이 되게 하려면, 장애인복지법을 장애인 기본법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정책의 주인인 장애인의 관점에서 필요한 것을 듣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만드는 정책을 펴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을 시작으로 현재 전국 지자체에 두루 확산된 장애인 콜택시의 경우 수요가 넓어지니 광역화 제안이 나오고 있고, 이에 대한 장애인 단체의 욕구가 강해 긍정적 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전담하는 특별교통수단 장애인 콜택시의 광역화를 반대합니다. 장애인도 누구나 길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고, 어떤 택시 브랜드의 차량도 예약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전적으로 떠맡고 있는 현재의 기형적 형태를 벗어나, 모든 택시법인 운행 차량의 20% 이상을 휠체어 탑승 가능 차량으로 전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개인택시가 휠체어 탑승 가능 차량을 운행할 경우 다양한 혜택을 줘, 도로에 운행하는 택시 5대 가운데 최소 1대 이상은 언제든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울러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장애인 등급제 폐지도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표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결국 외형만 다른 등급제가 될 뿐입니다. 장애유형별로 필요한 서비스가 저마다 다른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필요한 서비스에 각기 다른 배점을 부여해 총점에 맞춰 바우처 시간을 한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양한 해외 사례를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모범 사례에만 갇혀 생각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창의적 대안을 고민하고, 장애로 인해 부족함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모든 정책의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직장에서의 장애인 인식 교육에 대해 현장의 반응도는 어떠한가요? 그리고 장애인 인식 교육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더 발전해야 할까요?

A 법정의무교육으로써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은 이제 법 시행 2년 차를 조금 넘긴 상황입니다. 초기에 비해 교육에 대한 관심도는 크게 높아졌지만, 아직도 많은 기업이 다른 법정의무교육에 비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에 대한 현장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다만 강사의 역량과 콘텐츠의 편차가 다양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어려워진 집체교육의 부재도 극복해야 될 문제입니다.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처럼 미이행 시 과태료가 부과되고, 직장 내 괴롭힘예방교육처럼 구성원들의 관련 지식이 부족한 경우 갈등의 사전 예방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선 의무교육 시행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며, 제도적인 발전을 위한 주관 기관의 노력도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받아야 하는 기업은 국내 410만여 개에 달합니다. 그러나 자격증을 보유한 강사는 3천 명이 채 되지 않고, 기업의 관심 및 강사 공급이 적어 교육 이행률이 낮은 편입니다. 이를 해소해가는 과정에서 강사의 직업 안정성을 보장해가며 교육 이행률을 높여야 하는데, 강의료 지원 사업을 통해 기업에겐 무료로 강의를 듣게 하고, 강사에겐 낮은 강사비를 지급하고 있어 관점 변화와 제도 개선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Q 전하고 싶은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A 제 키를 땅에서부터 재면 1m가 채 되지 않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세상 누구보다 큽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상이 저를 올라온 높이가 아닌 헤쳐 나온 깊이로 봐 주었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의 아픔들은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 영웅의 뿌리를 튼튼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젠 그 줄기와 잎을 뻗어 힘겨운 누군가의 안락한 그늘이 되어가는 시간인 듯싶습니다. 꿈은 어딘가에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이행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과거 제가 그토록 아팠던 과거에 고대해왔던 덜 아픈 미래의 꿈속이며, 또 오늘은 먼 훗날 마침내 꿈을 이룬 제가 살아가고 있는 어제의 하루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영웅인 사람이 아니라, 존재도 영웅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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